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즈텍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잠깐의 쇠퇴기 === 1468년 몬테수마 1세의 아들 [[악사야카틀]]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이미 왕세자 시절부터 사포텍 도시국가인 테우안테펙을 성공적으로 포위 점령하는 등 군사령관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줬기에 사람들이 악사야카틀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그는 틀락스칼라를 완벽히 포위하고, 우악스텍과 믹스텍 방면으로 영향력을 넓혀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으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즈텍 제국이 단독으로 틀락스칼라를 정복하기에는 힘이 부족했기에 이를 도와줄 동맹 세력이 절실했다. 당시 악사야카틀은 테노치티틀란 중앙 사원구역에 새로운 기념물을 건설하기로 기획했다. 거대한 둥근 돌에 태양과 달력을 새겨 제국의 전쟁과 정복 사업에 바치도록 한 것이다. 전통에 따라 텍스코코나 틀라코판 등 여러 동맹국들에게 물자 및 노동력의 형태로 원조를 받았다. 태양 석비가 완공되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준공식을 어떻게 개최할지, 행사에서 희생제물로 바칠 포로들은 어디서 구해야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악사야카틀은 참석한 손님과 각국 사신들에게 테노치티틀란에 하루 더 머물도록 요청했다. 인근 최고의 강대국이자 적수 [[타라스칸]]을 공격해 포로들을 뜯어낼 구상을 해놨는데, 국력이 강한 타라스칸을 치길 위해선 동맹국 사신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타라스칸은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15세기 들어 급격히 패권국으로 올라온 인근의 강대국으로 함부로 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악사야카틀은 1476년 타라스칸을 치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대군을 조직했지만, 타라스칸은 그 2배 가까운 수의 대군을 동원해 아즈텍 제국과 맞섰다.악사야카틀은 단념하지 않고 전투를 시작했다. 전투는 하루종일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르자 악사야카틀의 정예 친위병은 거의 증발하는 수준으로 궤멸당했다.[* 다만 [[타라스칸]] 역시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즈텍 제국의 북서쪽 확장은 막아냈으나 타라스칸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타라스칸은 확장보다는 국경 요새화와 아즈텍 제국에 대한 경계 위주 정책으로 전환하며 수세로 들어갔다. 이후 타라스칸은 1522년 [[콩키스타도르]]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하며 살아남는 듯 하였지만, 결국 왕은 반역죄가 씌워져 처형당하고 스페인에게 병합당했다. 그래도 평화적으로 합병된 덕에 아예 인구가 쓸려나간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원주민 문화가 짙게 남아있을 수 있었다.] 아즈텍 제국 군대는 테노치티틀란으로 후퇴했고 5분의 1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패배의 충격은 엄청났다. 아즈텍 제국의 위신이 크게 실추당했고,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아즈텍의 통치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실의에 빠진 악사야카틀은 1481년 그대로 사망했다. 정황상 무능에 치를 떨던 신하들이 악사야카틀을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악사야카틀이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동생 [[티소크]]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테노치티틀란의 대피라미드 재건을 지시했고 휘하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삼국동맹 내에서 흔들리던 테노치티틀란의 지위를 공고히하고 3국 가운데 테노치티틀란의 우위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티소크는 나름 악사야카틀이 남긴 거대한 똥을 치우려 노력은 했지만... 즉위한지 5년도 안되어 불명의 이유로 사망했다. 티소크가 죽자 그의 동생 아위소틀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후 아즈텍 제국은 다시 부활에 성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